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다 미츠나리 (문단 편집) === 히데요시와의 만남 ===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첫 만남은 이렇다. 이시다 미츠나리는 오미국(近江国)[* 지금의 [[시가현]] 나가하마시]의 이시다촌이라는 마을에서 하급 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자랐다. 무사 [[계급]]이라고는 하지만 [[전쟁]]이 일어나면 [[아시가루]]로 이 시절은 이미 [[조총]]의 발달로 전쟁에서는 총알받이가 되기 일쑤였는데 봉록이라고 해도 얼마 안 돼서 전쟁이 있으면 약탈로 전리품이나 챙기는 신세였다. 이시다 미츠나리는 집에서 가까운 관음사라는 [[절(불교)|절]]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었다.[* 사찰은 교육 기관을 겸하고 있었다.] 교통의 요지였던 키타 오미는 [[상업]]이 발달한 곳이어서 [[주판]] 등 산술 교육을 이때 받았다고 추측한다. 한편 하시바 히데요시는 1574년 주군 [[오다 노부나가]]로부터 [[아자이 나가마사]]의 영지였던 오미 국을 물려받고 나가하마 성(長浜城)의 축성을 허락받아 인생 처음으로 성주가 되었다.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성주까지 오른 하시바 히데요시에게는 가신이라고 부를만한 인재들이 부족했다. 히데요시가 오미 국의 영주가 되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[[매(조류)|매]]사냥을 하던 히데요시가 이시다 미츠나리가 있던 관음사로 찾아와서 [[차]]를 청했는데, 이때 차 대접을 한 사람이 사키치였다. 처음에는 큰 잔에 먹기 좋게 미지근하고 연한 차를 내왔다가 차를 단숨에 마신 히데요시는 한 잔을 더 청했고 이번에는 처음 잔보다 조금 뜨겁고 진한 차를 절반만 채워서 내왔다. 히데요시가 한 잔을 더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제대로 뜨겁고 진한 차를 작은 잔에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, 히데요시가 목이 마를 것이라 여겨 첫 잔은 한 번에 마시기 좋게 미지근하게 타온 것. 이를 대접받은 히데요시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영특하다고 여겨 감탄하고 그날 코쇼[* 시중을 드는 시동]로 거둬들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15세였다. 이것이 유명한 '''세 잔의 차'''라는 훈훈한 일화인데,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. [[https://youtu.be/3Akxm3QyKlc|노부나가의 야망: 혁신에서의 세 잔의 차 이벤트]] 당시에도 이 일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데 "이시다는 그런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인간이고 히데요시는 그런 행동을 충분히 좋아할 만한 사람이다"라는 뒷이야기는 있었다고 한다. 이 일화로 그는 '삼헌차의 사나이'라고 불리지만, 그가 뛰어난 행정능력에 비해서 군략이 없음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더 많이 쓰였다. 적어도 18세 때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기록은 있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40px-Statues_of_Hideyoshi_and_Mitsunari.jpg|width=300]] 시가현 [[나가하마역]] 앞에 있는 미츠나리와 히데요시의 첫 만남을 묘사한 동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